윤치호 선생 탄신 110주년 기념 첫 추도회, 목포에서 열려

이승민 특파원 happydoors1@gmail.com | 2019-10-20 21:5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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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0월 15일 윤치호 전도사와 다우치 치즈코 씨가 결혼식을 올리고 촬영한 당시의 기념사진.(사진=공생복지재단 제공)

[로컬세계 이승민 특파원]지난 18일 전남 목포 신안비치호텔에서 ‘공생원 설립자 윤치호 선생 탄신 110주년 기념 추도회’가 한국과 일본에서 후원자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기념 추도회는, 1951년 1월 윤치호 전도사가 당시 400명이 넘는 고아들의 식량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방문 길을 나섰다가 행방불명(당시 42세)이 된 지 68년 만에 추모하는 첫 추도식이다.

 

▲윤치호 선생의 장남 윤기 이사장 부부가 추도식을 마친 후 2부 기념공연을 관람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 이승민 기자)


장남인 윤기 ‘고향의 집’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그동안 어머니의 추도식 만을 지켜오면서 아버지는 빼놓느냐고 꾸지람도 많이 들었다. 내가 9살 때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셨다. 유달산을 넘어서 학교 수업을 마치고 공생원에 돌아오면 오늘은 아버지가 오셨을까. 혹시 북쪽으로 끌려가지 않았을까.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로 불러보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70여 년을 아버지를 기다리며 살아왔다. 살아계신다면 올해 110세다. 아버지가 설립한 공생원도 창립 91주년을 맞이했다. 죄송하지만 이제는 사망신고도 하고 제사도 드리고 싶다. 아버지가 만드신 공생원 설립일과 어머니가 태어나신 생일날을 기준 삼아 추도일을 정하겠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추도식 예배 중 공생복지재단 러브플러스 합창단이 특별찬송을 부르고 있다.

 

추도예배는 임청일 장로의 사회로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찬송에 이어 기도 윤정 목사, 찬양 러브플러스합창단, 설교 홍정길 목사, 축도 윤여권 목사 순으로 진행됐다.


2부 기념식은 가수 유열의 사회로 오병인 공생복지재단 대표의 내빈소개와 신승남 공생복지재단 이사장의 인사말에 이어 김영진 행사위원장의 추도사가 있었고 축사에는 윤병태 전라남도 정무부지사, 김종식 목포시장, 윤소하 국회의원, 서상목 한국사회복지협회장, 김휴환 목포시의회 의장이 해주었다. 이어 추모의 노래 '다시오소서 윤치호'를 광주여성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목포시립합창단이 감동 깊게 불러주었다.

 

▲추도회에 이어진 기념식에서 광주여성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목포시립합창단이 '다시오소서 윤치호'를 부르고 있다.

이어진 수상식에는 공로패 임동신, 배광언 전직 이사장 두 명이 받았고, 표창장은 장기근속 직원 맹현숙 외 6명, 선물은 공생복지시설 거주자 300명과 직원 150명이 받았다. 윤학자 예술봉사공로패는 주금자 전 수선화합창단 지휘자가 받았고, 감사패는 김현옥 작곡가, 정두리 새싹회 이사장, 공로패는 이토 이사오 일본 유니벨재단 이사장과 최성균 미래복지경영회장이 각각 수상했다.


이어서 3부에는 ‘공생원 설립 91주년 축하회’가 오찬과 함께 열렸다. 가수 유열의 사회로 진행된 축하회는 무대 위에서 화려한 춤과 노래로 펼쳐졌다. 전남예술고등학교 한국무용모듬북퍼포먼스를 시작으로 내빈과 공생가족의 케익 커팅, 축가는 윤병길 예술대 음악학 교수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김우성 마음의 가족 마케팅 본부장이 ‘하얀 나비’를 각각 불렀고, 건배사 김성이 전 보건복지가족부 장관, 광주여성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연주, 음악잔치에는 정홍률 민유기 연주가의 트럼펫 색소폰 합주가 있었고 끝으로 공생원가를 다같이 불러 축하회를 더욱 뜻깊게 했다.

 

▲공생원 설립 91주년 기념 축하회에서 전남예술고등학교 학생들이 한국무용모듬북퍼포먼스를 춤으로 표현하고 있다.


4부에는 전문직 육성 국제교류 세미나가 열렸다. 사회 겸 코디네이터를 맡은 이경림 아동복지실천회 세움 상무이사의 진행으로 이토 이사오 일본 유니벨재단 이사장의 인사말, 축사에는 안병옥 전남 보건복지국장, 심인섭 목포시 자치행정복지국장, 서상목 한국사회복지협의회 회장, 박민서 목포대학교 학장이 해주었다. 기조강연에는 '아동권리와 교육'이란 주제로 김성이 전 보건복지가정부 장관(현 자광복지재단 이사장)이 발표했다. 국제교류세미나 일본 참가자 발표에는 구로키 야스히로 도시샤대학 교수, 우치노 마유미, 소에다 미유, 토코 토모요, 마쓰시타 료헤이 씨가 각각 발표했고, 윤기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 이사장과 장영신 한국사회협의회 정책연구실장의 평론으로 마무리했다.

 
5부 한일우호교류회는 이날 행사를 위해 참석한 일본인 40여 명과 국제교류세미나 한국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앉아 만찬과 더불어 뜻깊은 한일친선교류의 시간으로 이날 모든 행사의 휘날레를 장식했다.

 

▲공생원 내에 위치한 윤치호관 앞에서 공생원 어린이들과 일본에서 방문한 후원자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편 공생원 설립자 윤치호는 1909년 6월 13일 전남 함평면 대동면 상옥리 옥동 부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윤영대와 어머니 권채순 씨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 파평 윤씨의 종손으로 태어났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윤치호는 1923년 14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과로로 사망하자 소년가장이 되어 집안 살림을 꾸려나갔다. 어렵게 살아가던 1924년 어느 날 미국인 여선교사 줄리아 마틴(Jullia Matrin)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다.


줄리아는 윤치호의 총명함과 신앙심에 감동을 받아 피어선고등성경학원에 입학을 권유해 공부를 시켰다. 1933년 졸업하자 전남 최초의 교회인 목포 양동교회에 소속을 두고 전남노회의 전도사로 활동하게 됐다. 늘 선교자금이 부족했던 윤 전도사는 목포시 호남동 18번지에 허름한 초가를 지어 ‘나사렛 목공소’를 차렸다. 예수님처럼 일하겠다며 목수로 일했다.

 

▲윤치호의 피아선고등성경학원 졸업장.

 

신사 참배 반대 설교로 48차례나 구속되는 등 오직 신앙과 일에만 집중하던 그는 다리 밑에서 오갈 곳 없이 추위에 떨고 있는 고아들을 만나면서 인생의 분기점을 맞는다.

 
윤치호 전도사는 하늘을 향해 기도로 결심했다. “부모를 잃은 슬픈 고아들에게 춥고 배고픔까지 안겨줄 수는 없습니다. 이들에게 더 이상의 고통을 안겨주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남은 여생 오갈 곳 없는 고아들을 위해 살겠습니다.”


늘어나는 고아들을 데리고 목공소에서 함께 살았아가던 1928년 10월 31일 윤 전도사는 그곳에 ‘공생원’ 간판을 걸었다. 그의 나이 19세였다. 어떻게든 고아들에게 춥지 않게 재워주고 굶기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엿 가게를 열고 엿장사를 하기도 했다. 집 없고 배고픈 고아들은 모두 공생원으로 몰려왔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거지대장’이란 호칭이 더 자연스럽게 불려졌다.

 

▲당시 윤치호 전도사가 고아들과 함께 비바람 막을 집을 짓고 있다.

하지만 공생원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주민들의 반발로 상락동, 무안군 삼향면 임성리, 영양리, 신안군 압해도, 삼호면 등으로 옮겨 다니다가 주변 후원자들과 양동교회의 도움으로 1930년 4월, 대반동(죽교동)에 80평 규모의 목조건물을 짓게 되었고, 1932년 12월 15일 정식으로 목포 공생원 설립인가를 받았다.

1937년 4월에는 총독부의 도시계획에 의해 신안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유달산 기슭, 목포시 죽교동 473번지에 2000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고아들의 보금자리를 만들게 되었다. 이로써 윤 전도사는 고아들의 아버지로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에 목마른 고아들이 더욱더 요구했던 것은 따듯한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고아들에게는 어머니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윤 전도사는 날마다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엄마의 사랑을 못 받고 자라는 고아들에게 어머니를 달라고 기도하던 어느 날 기적이 벌어졌다. 운명적으로 일본인 여선생을 만나게 된다. 본명은 다우치 치즈코(田內千鶴子), 1912년에 일본 고치현에서 태어난 치즈코는 조선총독부의 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7세가 되던 1919년, 목포 땅을 밟았다. 야마테소학교(현 유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에는 목포공립고등여학교를 졸업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치즈코는 다카오 마츠다로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우치 치즈코 선생님이 풍금을 연주하면서 고아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있다.

 

다카오 목사는 당시 정명여학교 음악교사로 일하던 치즈코에게 윤치호 전도사가 꾸려가고 있는 공생원을 소개했다. 1936년부터 치즈코는 시간표를 정해 공생원에 가서 노래를 가르쳐주고 밥도 해주고 씻겨주면서 고아들의 선생님이자 어머니가 되어주었다. 고아들은 사랑스러운 치즈코 선생님의 음악시간을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살았다. 윤 전도사도 마찬가지였다. 어두웠던 공생원이 밝아졌다.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났고 공생원에 생기가 넘쳐났다. 

 

윤치호와 치즈코는 기독교인으로서 고아들을 자식으로 삼아 예수의 사랑을 실천했고 고아 없는 세상을 꿈꾸며 살았다. 공생원 설립 10주년 기념일인 1938년 10월 15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했다. 신부가 된 다우치 치즈코(田内 千鶴子)는 남편 윤치호(尹致浩)의 성과 자기 이름을 넣어 ‘윤학자(尹鶴子)’라는 한국식 새 이름을 지었다. 당시 윤치호의 나이 29세, 윤학자 26세였다.

 

▲공생원에서 보모들과 함께 공생원 아이들을 돌보는 윤치호와 윤학자.

 

윤치호 부부는 포근하게 잠든 천사같은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행복해했다. 윤치호의 일기에서 “한 녀석은 꿈속에서 부모를 만난 모양인지 연신 생글거리고 있고 또 다른 녀석은 무엇인가 맛있게 먹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고 표현했다. 신혼부부는 해맑은 아이들의 얼굴에서 잠시나마 고민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일 뿐 격랑의 세월은 계속됐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로 몰려 수난을 겪어야 했고, 6.25사변은 공생원의 존망을 넘나들게 했다. 1950년 7월 24일 인민군 6사단이 목포에 들어와 주민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처형하기 시작됐다. 공생원에도 7월 27일 인민군들이 들이닥쳤다. 윤 전도사를 앞에 세워놓고 구장(區長)을 한 죄, 인민을 갈취한 죄, 일본인과 결혼한 죄 등 죄목을 만들어 인민재판을 열었다.


마을 사람들의 변호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대신 인민에게 봉사하라는 조건으로 대반동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겼다. 그로부터 3달 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인민군이 후퇴하자 이번에는 인민군을 도운 이유로 국군에게 붙잡혀갔다.

 

여러 인사들의 구명운동으로 1951년 1월 석방이 됐다. 구속된 동안 못 먹고 시달려 건강이 악화되었고 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들을 지켜만 볼 수 없었다. 1951년 1월 27일, 식량문제 상담을 위해 전남도청 사회과를 방문하러 길을 나섰다가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사방팔방으로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윤 전도사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홀로된 윤학자 여사가 전쟁고아들로 넘쳐나는 공생원에서 500명이 넘는 고아들을 챙기며 살았다.

홀로 공생원을 맡은 윤학자는 기다림이나 슬픔을 내색할 여유도 없었다. 당시 사정이 어려운 중에도 공생원에는 전쟁고아들로 폭증했고 500명이 넘는 고아들을 당장 먹이고 보살펴야 하는 일이 시급했다.

 

1954년 6월 C.C.F.(세계기독교 아동복지회, 현 한국어린이재단)에 가입시켰고 1956년 12월 26일에는 법인 설립허가를 받았다. 1956년에 공생원 조선소를 설치했고, 제주도에는 목장 축사를 설치해 1957년 미국에서 젖소 20두를 기증받았다.

 
1961년 10월, 공생원 영아 분원이 설립됐고, 1964년 10월에는 일본에서 후원회가 발족됐다. 1967년 5월에는 일본 오사카 소재 박애사(博愛社)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공생원은 본격적인 아동복지시설소로 발전해갔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윤학자 원장은 1963년 8월 15일 대한민국 문화훈장 국민장, 1965년 목포 제1회 목포시민상, 1968년 일본 황실에서 남수포장 등 한일 양국으로부터 상을 받았고 1969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보관장이 추서 됐다.

 

▲당시 윤학자 공생원 원장이 고아들을 데리고 뒷산에 올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윤 원장은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눈을 감고 남편을 생각했다. “여보, 나 없는 동안 수고 많았소” 하면서 쌀을 짊어지고 금방이라도 들어올 것 같은 남편 생각에 잠시 설레 보지만 눈을 떠보면 현실은 냉정했고 비참했다. 영양부족으로 허약해진 아이는 건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었다. 하루에 한 두 명씩 죽어갔다.


부모의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죽어가는 처지가 하도 불쌍하여 차가워진 아이를 가슴에 안으면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몸을 닦아주고 수의를 입혀 그 곁에서 하룻밤을 같이 잤다. 부모의 품에 안겨보지 못하고 마지막 떠나는 길에 하룻밤이라도 곁에 있어주고 싶어서였다. 날이 밝으면 차가운 아이를 업고 뒷산에 올라가 눈물로 묻어주었다.

 

일일이 사랑해주고 챙겨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여 죄인의 마음으로 살았다. 아이들은 늘 춥고 배고팠다. 굶주린 아이에게 밥알 하나는 지구보다도 컸다. 아이들에게 죽이라도 먹일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슨 고생이든 서슴치 않았다.

 

▲공생원 원내에는 국민이 주는 희망의 상 '어머니의 탑'이 우뚝 서있다. 사진은 공생원 정애라 원장.

그렇게 동분서주 공생원에서 3000여 명을 길러낸 윤학자 원장은 1967년 10월, 과로가 겹쳐 쓰러지더니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1968년 10 월 31일, 그녀가 태어난 56회 생일날에 아쉬운 공생원을 남겨둔 채 파란만장했던 삶과 작별했다.

 
장례는 목포역 광장에서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신문은 "3만 조객들의 흐느낌을 받으며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 여사 떠나시다" 라고 추모했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남편을 이승에서는 만나지 못했다. 태어날 때는 화려하고 풍부한 집안에서 일본인으로 태어났지만, 떠날 때는 빈곤한 고아들의 어머니가 되어 3000명의 자식들을 품에 안고 먹이고 씻기고 입히시다가 한국 땅에서 한국인으로 묻혔다. 

 

▲유달산 기슭에 자리 잡은 공생원 입구에는 윤치호 부부가 고아들과 한 가족이 되어 사는 사랑의 가족상이 있다. 뒤에는 유달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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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견]

정인숙님 2019-10-21 07:14:48
윤치호 선생님 윤학자 선생님 지상에서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아들을 위해 파란만장했던 삶들이 그림처럼 떠오릅니다.
이제는 헤어지지 말고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고영선님 2019-10-21 07:18:57
감동 감동입니다.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윤치호 윤학자 이야기입니다.
탄생 110주년을 축하드리며 아울러 추모하고 당신의 뜻을 기립니다.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 하늘나라에서 이루시고 행복하소서.
이명길님 2019-10-21 07:40:20
윤치호 윤학자 선생님 이제는 저 세상에서 행복하소서.
이승에서 몸은 힘든 인생길이었습니다만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큰 교훈이 됩니다.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김유신님 2019-10-21 07:48:57
일본인으로써 한국 고아들의 어머니가 되신 윤학자 선생님은 한일간에도 단단하고 튼튼한 다리를 놓아주셨습니다. 자기가 낳은 한 명의 아이도 키우기 힘들다고 하는 현실을 보면서 윤학자 선생님의 삶은 가히 성인이셨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박은숙님 2019-10-21 09:08:13
공생원의 역사 너무너무 감동입니다.
윤치호 윤학자 선생님의 삶을 현장에서 보는 듯이 감동 깊게 써주신 기자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인생길이 힘들다고 투정부리는 사람들이 많은 이 때에 큰 교훈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윤치호 윤학자 선생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전길선님 2019-10-22 06:19:42
감동하여 눈물이 날것같습니다.
한국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한일 양국의 역사교과서에 넣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치호 선생님 윤학자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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